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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 넥스트 도어 (The Room Next Door, 2024) 결말 포함 후기책, 영화 리뷰 2024. 11. 7. 19:39
오랜만의 나들이에 집에 일찍 들어가기는 싫고 무작정 걷다 영화를 보기로 했다. 가장 가까운 시간에 상영하는 영화를 찾다 보니 '룸 넥스트 도어'라는 제목이 눈에 띄었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 틸다 스윈튼이 나온다. 잠깐의 검색으로 알게 된 사실은 스페인의 대표적인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연출을 했고 올해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영화라는 것이다. 그럼 볼 만은 하겠지 하고 표를 끊었다.
영화는 베스트셀러 작가 잉그리드(줄리앤 무어)의 책 사인회에서 시작한다. 잉그리드는 사인회를 찾아온 친구를 통해 옛 잡지사 동료이자 오랜 친구인 마사(틸다 스윈튼)가 말기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얼마 후 잉그리드는 마사의 병실을 찾고, 마사는 지나간 시간들에 대한 긴 이야기를 시작한다. 딸과 어떻게 왕래가 끊어지게 되었는지. 아이의 아버지가 전쟁의 트라우마 속에서 그들을 떠나 어떻게 부서졌는지. 오해는 겹겹이 남겨둔 채 종군 기자가 되어 그간 자신이 어떻게 아드레날린에 이끌려 살아왔는지. 마침내 그녀의 삶을 이해해 줄 누군가를 기다리며 평생 이야기를 쌓아왔던 사람처럼, 영화 내내 마사는 여러가지 기억과 사변을 쏟아 내고 잉그리드는 동행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병실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맨해튼에 위치한 마사의 아파트에서 계속된다. 다음 치료를 위해 잠시 퇴원을 한 마사는 병세가 호전되지 않을 것임을 직감하고 다크웹에서 약을 구해 안락사를 준비한다. 그리고 잉그리드에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부탁을 한다. 가장 친한 친구들에게도 퇴짜를 맞은, 생을 마감하는 순간 옆방에 함께 있어 달라는 황당무계한 부탁을. 잉그리드는 놀랍게도 승낙한다. 죽음이 두려워 그에 대한 책까지 썼던 잉그리드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가 죽음의 공포를 혼자 직면하길 바라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I think I deserve a good death." -- Martha 마사는 그녀의 일상과 추억이 담긴 공간에서 죽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낯설지만 아름다운 곳. 마사는 교외의 외딴 숲 속에 위치한 고급 저택을 한달 동안 빌린다. 역동적인 그림과 오브제가 가득한 마사의 도심 속 아파트와는 사뭇 다른 나낌의 공간이다. 거실에 걸린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처럼, 강렬한 햇빛 아래 베일 듯 날카로운 건물의 디자인이 숲의 울창함과 대조를 이룬다. 마사는 2층 침실에, 잉그리드는 옆방 대신 1층의 침실에 짐을 푼다.
마사의 마지막 시간들은 충실한 동행자인 잉그리드와 함께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아름다움을 온몸의 감각으로 흡수하려는 듯, 둘은 함께 숲속을 산책하고, 풀장 앞의 선베드에 누워 햇빛을 쬐고, 서점에서 흥미로운 제목의 책을 고르고, 좋아하는 영화를 보며 밤을 지새운다. 하루 하루가 평화로운 동화의 삽화처럼 흘러간다.
그리고 햇살 좋은 어느 날, 잉그리드는 저택을 벗어나 과거 마사의 연인이자 자신의 연인이었던, 지금은 마사의 대담한 계획에 대해 털어 놓을 수 있는 유일한 친구인 데이미언을 만나 식사를 한다. 이들의 대화는 영화를 통해 알모도바르 감독이 던지고 싶었던 메시지를 관통한다. 데이미언은 염세주의자다. 더 이상 이 세상에 희망이 없음을 토로하는 데이미언에게 잉그리드는 비극 속에서도 살아갈 다양한 방법이 있음을 이야기한다. 어떤 면에서 유한한 삶 가운데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마사와 닮아 있다. 비극에 맞서거나 부정하기보다, 그 속에서 길을 모색하는 삶을 존중하는 잉그리드이기에 마사의 여정을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마사는 마지막을 준비한다. 강렬한 노란색 셋업 정장을 입고 새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두 통의 편지를 쓴다. 한 통은 잉그리드가 곤란하지 않도록 혼자서 안락사를 준비한 과정을 세세히 밝힌 진술서이고, 다른 한 통은 잉그리드에게 남기는 작별의 편지다. 투병하기 시작한 이후로 글이 써지지 않는다던 마사는, 마침내 진정한 평안을 찾은 듯, 오히려 옆방에 네가 있지 않아 다행이라며, 햇살이 좋은 날에 떠나기로 했다며 망설임 없는 글을 완성한다. 그리고 햇살 아래 선베드에 누워 죽음을 맞이한다.
지리한 경찰 조사 끝에 잉그리드는 마사가 머물렀던 저택을 찾아 온 그녀의 딸 미쉘(틸다 스윈튼이 1인 2역으로 연기했다)을 만난다. 마사를 꼭 닮은 미쉘은 마사와는 달리 몰개성한 옷차림에 무표정한 사람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마사의 부재가, 그녀가 머물렀던 공간이, 모녀를 다시 잇는다. 마사가 누웠던 선베드 위에 누워, 잉그리드가 전하는 이야기를 통해, 마사가 즐겨 듣던 새소리를 통해, 어머니의 삶을 받아들인다. 그들 위로 눈이 내린다. 마사가 즐겨 외웠던 제임스 조이스의 시가 각색되어 잉그리드의 목소리로 읊조려지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눈이 내린다. 네가 지쳐 누워있던 숲으로, 네 딸과 내 위로, 산 자와 죽은 자 위로.”
"Pink snowflakes, there had to be something good about climate change!" --Martha 이 영화의 많은 장면들과 대사들은 어떤 면에서는 비현실적이다. 죽어가는 환자라고 하기에는 마사와 그녀의 공간은 형형색색으로 다채로우며, 그녀가 쏟아내는 이야기들은 슬픔이나 아쉬움보다는 위트가 적절히 섞인 철학적인 문장들로 가득하다. 어떤 이들은 삶의 고통을 축소하고 미화하여 피상적인 메시지만을 던진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면 영화는 의도적으로 마사가 고통을 넘어 죽음 앞에서 느끼는 생의 강렬한 아름다움을, 꿈 같은 이미지와 언어로 전달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산 자와 죽은 자 위로 동일하게 내리는 분홍빛 눈처럼, 누구에게나 유한한 삶 가운데 아름다움은 존재한다고, 각자의 방식으로 그 경이로움을 발견하길 바란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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