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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분노한다. 당연히 존중받아야 할 개개인, 내가 사랑하는 이들, 특히 소수의 가치가 권력의 여러 형태에 의해 희생 당할 때 나는 분노한다. 가깝게는 유독 가방끈 긴 사람들이 많던 한 모임에서 부모님을 은근히 무시하는 처사에 속이 상했고, 미혼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내 자질을 의심하는 교육계에 불편함을 느끼며, ‘다르다’는 이유로 따돌림 당하고 학대 당하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울컥한다.
사실 이전의 나는 소수라는 개념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유독 멍 때리며 혼자 놀기를 좋아하던 조금은 유별난 아이이긴 했지만, 한국 땅에서 대부분의 사람들과 같은 피부색으로 태어나 다수의 언어를 모국어로 배웠으며, 평범한 가정 환경 가운데 별탈 없이 공교육 과정을 착실히 밟아 다수가 선망하는 명문대에 진학을 했다. 소위 주류의 삶을 살았다.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목격할 때마다 내가 그 소외의 주체가 되지 않고자 했지만 오히려 방관하는 다수에 가까웠다.그러다 미국에 왔을 때 처음으로 소수의 경험을 의식하게 되었다. 나의 생김새로, 혹은 언어의 어눌함으로 가게에서 앞 손님보다 더 불친절한 대우를 받았고, 길거리에서 동양인을 향해 무작정 퍼붇는 조롱 섞인 언사를 듣기도 했고, 차별에 대해 민감한 대학원 수업에서조차 첫날부터 그룹을 짤 때 은근히 배제되는 경험을 한 적도 있었다. 수업에서는 정작 사회 정의를 가르치지만 이런 소외의 경험은 비일비재하기에, 어쩌면 사소하다는 이유로 당사자조차도 의식하지 못하고 때로는 묵인 당하며, 그 무지와 묵인의 역사가 보이지 않는 차별의 벽을 견고히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권력이 권력을 가진 소수의 통제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그 통제에 순응하는 대중들에 의해서 유지된다고 했다. 강자들이 제시하는 가치를 주입하는 교육 기관과 받아들이는 대중이 있기에 기존의 권력 구조가 유지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형성된 다수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들은 사회적 약자가 된다. 그 사회에서 '논리적'이라고 규정하는 언어의 형태를 구사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정식 교육 기관에서 벗어난 다른 삶의 현장에서 배움을 쌓아왔다는 이유로, 사회가 제시하는 매력적인 외형을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특별함을 존중받지 못하고 차별 당한다.
나는 이 곳에서 소수의 경험을 했다고는 하지만 동시에 여러 기준로 볼 때 다수의 가치에 의한 혜택을 더 많이 받은 사람이다. 하지만 내가 서있는 이 자리가 순수한 내 노력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그 이면에 권력의 구조 속에서 희생되는 누군가가 있었음을 이제 안다. 그동안의 내 무지함에 분노한다. 하지만 여전히 분노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분노가 분노로만 그치지 않고 내가 부지 중에 누린 혜택을 다수에 역행하는 방향으로 돌려내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