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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의 속사정이 드러난 이후에도 내 눈은 그것을 반박하는 증거들을 찾고자 바쁘게 움직인다. 작은 움직임, 말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고민하는 이 과정의 반복이 결코 나에게 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데 멈출 수가 없다. 인내로 온전함을 이루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고 싶은 말을 애써 억누르지만 답답함은 쌓여만 간다. 나의 바람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이 상황이 꽤나 혼란스럽다.
이렇게 인내하는 과정이 주님이 일하심을 잠잠히 기다리는 과정인지 돌아보아야 한다. 전전긍긍하며 현재의 상황이 변화하길 기다리는 내 모습 안에 주님의 자리는 있는 것일까?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을 때 내 중심은 결국 어딘가 어긋나 있는 것이 아닌가? 흔히들 말하는 기도해야할 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도하는 중에도 내 마음은 자꾸만 산으로 간다. 떼라도 써 봐야 하는 걸까? 내 원이 아닌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한다는 예수님의 기도(눅 22:42)를 닮아야 한다는 스스로에의 채찍질에, 내려놓아지지 않는 마음을 억지로 달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기도를 해 왔다. 하지만 내 솔직한 심정을 고상하게 포장한 기도는 허공에 흩어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기도뿐만이 아니라 다윗의 떼 쓰는 기도도 있다. 다윗은 밧세바와의 간음으로 낳은 아이의 목숨을 하나님께서 데려가실 것이라는 선지자 나단의 말에 식음을 전폐하고 밤새도록 땅에 엎드려 기도했다. 본인의 잘못으로 인해 주님께서 그 벌을 내리겠다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다윗은 그것을 바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어느 부모라도 그랬겠지만) 떼를 쓴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 아이가 죽은 것을 깨달은 이후에는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왕궁으로 돌아와 명령하여 음식을 그 앞에 차리게 하고 먹었다" (삼하 12:20)고 성경은 기록한다. 그의 행동을 의아해 하는 신하들에게 다윗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삼하 12:22-23)다윗의 기도는 날것 그대로의 솔직함이었다. 하나님은 그 솔직한 기도의 끝에 순종하는 마음까지 부어주셨다. 주님의 뜻이 내 마음 가운데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는 애써 고상한 척 순종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다윗처럼 일의 귀추를 보기까지, 더 나아가 주님의 뜻에 순복할 때까지 열심히 떼를 써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심지어 예수님도 골고다 언덕을 오르기 전 날까지, 땀이 피처럼 흐를 때까지 잔을 옮겨 달라 기도하지 않으셨던가?
과거에는 내 욕심대로 행동한 이후에 떼를 쓰며 기도했다면, 이제는 어떤 행동 이전에 주님께 떼를 써보아야겠다. 돌아보면 나의 하나님은 내 크고 작은 불순종 이후의 회개와 기도도 들으시고, 주님의 응답이 받아들여지게 하시며, 그 이후의 평안함까지 허락해 주셨다. 하물며 지금의 기도는 더 기쁘게 받아주시지 않겠는가? 내 믿음의 그릇은 아직 너무 작아서 온전히 모든 일을 주님의 뜻에 맡길만한 깜냥은 되지 않지만 주님의 옷자락이라도 잡으며 기도하는 믿음만은 놓치지 않길 기도해 본다.